
나는 지방대 중퇴자에 고졸이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나라 입시카르텔을 내 손으로 뿌리친지 벌써 3년이 지나간다. 영문학도였던 나는 성적이 우수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목표와 내가 생각했던 학교생활을 누리고 나니 뭔가 허무한 시기가 반년정도 있었던것 같다. 그때가 아마 2019년 1학기였던것 같은데 더 디테일하게 말해보자면 나는 애초에 영문학과에 입학 아니 전과할때 영문학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단순히 나한테 제일 친숙한 외국어가 영어였고 이 학과 나오면 영어잘해질줄 알았다. 그리고 이거 배워서 외국인들이랑 내 메세지와 철학을 공유하는게 내 목표였지. 문학에 관심은 하나도 없었다. 학과 교수님과 친분도 쌓고 과제 열심히하고 공부열심히 하니까 전공 점수는 아주 잘나왔다. 대표적인 아싸메타로 전공점수 쓸어간 메타인데 아직도 이게 유효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지내다 여러 문학을 접하며 미국건국초기 시인들로 부터 엄청난 메세지를 받게 된다. 본의 아니게 미국민주주의 기반인 개인주의에 대해 되게 철학적인 고찰을 그때 잠깐 간접적으로 문학을 통해 경험했었고 , 정확이 3학년 1학기때 교수님들 연구실을 무작정 찾아가서 나의 미래에 대해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2명의 교수님이셨는데 한분은 한국인 한분은 미국인이었다. 지금 모두 다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나서 죄송하지만, 모두 주옥같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때 당시 나는 영어라는 언어와 소통방법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 문학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열정이 안느껴진다라고 말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미국인 교수님이 아주 인상깊게 조언을 해주셨는데, 너무나 강한 메세지여서 영어로 말했지만 신기하게도 모든 워딩이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 분이 말하기를 그 분은 그냥 친형이 운영하는 인쇄소 노동자였는데 (그것도 파트타임잡이었다) 만으로 29살까지 그냥 그렇게 살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지역신문지의 기자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게 됬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으로 들어가보면 그 지역 신문지 쪽에서 스포츠부가 신설되었는데 , 지원자가 마땅히 없기도 하고 신뢰가 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어쩌다 보니 친형의 귀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친형은 자기 주변에서 가장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인 교수님을 추천해줬고 면접을 보고 인턴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지역 신문지에서 야구를 주로 취재하다가 기사를 작성하면서 이 작문이라는 창작활동에 굉장한 쾌감을 느꼇고 그 뒤로 갑자기 대학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교수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이 말을 해주고 나에게 "가슴이 뛰는 곳으로 가라"라고 조언해주셨고 그 말을 듣고 난뒤 엄청난 확신이 생겨 나는 충분한 고민끝에 내 여정의 항로를 내 스스로 개척해보자고 마음먹게 됬다.
이 후로 내가 어렸을때 뭘 하면서 행복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크게 두가지를 깨달았는데 첫째, 나는 무언가 만들거나 그리는것을 좋아한다. 둘째, 나는 남들을 웃기는거나 혹은 관심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 두가지였다. 그렇다 나는 유치원도 미술유치원을 다녔고 , 학교에서는 미술시간만 뼈빠지게 기다리는 학생이었고 초등학생때는 인기투표 1등 할 만큼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중학교때부터 자사고 입시학원을 다니며 무뎌진 내 감각을 다시 찾는 순간이었다. 짜릿했고 설렜고 또 두려웠다. 내 인생처음으로 내가 결정하는 일이었고 처음으로 내가 생각한 일이었다. 이렇게 내 여정을 정하고 항해한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것 같다. 제로베이스로 시작해서 회사에 취직해 지금은 회사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다. (사실 직책을 제안 받았는데 나는 직책만큼 급여를 대우해주는 대신 직책은 거절을 했다. 지금은 엄청 후회하고 있다 ㅠ) 어느정도 회사에서 입지를 다지고 여유가 생기고 나니 많은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연차높고 실력좋은 작업자분이 있으신데, 더블체크를 하기위해 우리는 서로의 파일을 자주 확인을 해준다. 근데 가끔 내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도 안되는 실수를 하실때가 있다. 작업적인 실수를 떠나 이거는 마인드셋에 관련된건데 나같은 경우에는 프랍하나를 만들더라도 너무 즐거워서 최대한 많은 디테일을 넣으려고 하는 반면 , 그 분은 자신이 생각했을때 귀찮거나 하찮다고 여겨지는 어셋들은 엄청 대충 만들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만 적으면 이 사람이 게으르고 실력없는 사람처럼 비춰질수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실력이 아주 좋고 다방면으로 아주 우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흠이 있다는게 놀라웠고 동시에 나는 그 이유가 뭔지 빠르게 캐치 할 수 있었다. 언젠가 같이 밥먹을때 그 분과 이런 얘기를 한적있다. 자기는 고등학생 선수반 때부터 CG를 계속해서 도합으로 따지면 10년 이상 이 일을했고, 자기는 자기가 재밌어하는걸 잘하는 스타일인데 , 이 회사는 너무 많은걸 나에게 시킨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이 분은 이미 매너리즘에 빠질때로 빠질만한 연차였고 또한 이 회사는 환경자체가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할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근데 나는 이 회사가 첫회사이고 그리고 아직도 프랍하나를 만들더라도 퀄리티있게 만들면 가슴이 뛰는 도합 4년차 작업자였던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나이에 비해 적은 경험때문에 왠지모를 불안감에 떨었었는데 이것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나는 반대로 남들이 못보는것을 잡을수있고 아직 소모할 연료도 많다는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이러한 특수한 환경의 회사 덕분에 모델러인데 게임엔진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간단한 애니메이션도 잡을줄 안다. 그리고 배경 캐릭터 가리지 않고 모두 모델링이 가능하다. 회사에서 렌더링도 내가 도 맡아서 하는 편이고 전체적인 룩뎁도 내가 담당해서 관리 하는 편이다. 내가 할줄 모르는건 진짜 리깅 하나밖에 없다.(사실 할줄은 알지만 제대로 하기 싫어서 안하는게 더크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회사덕에 이렇게 스탭업 한거라고 볼 수 있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해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 사실 특별한 기술없이 이것하나로 이렇게 성장해왔던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것은 수많은 메스미디어들이 양산해내는 부정적인 메세지를 걸러내고 사회적으로 철들지 않고 , 자아실현을 위해 무의식 속의 나를 보듬어 주는것을 잊지않고 실행하는 중이다. 즉 , 나는 고졸이지만 대학을 그만둘 용기가 있었고 , 또 어릴적 내가 원했던 자아를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아직 나는 29살이지만 13살이고 죽을때 까지 13살 일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조건 성공할 것 이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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